[2009] 프로스트 vs 닉슨

영화보기 2009. 3. 6. 17:41



70년대에 일어난 워터게이트사건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아무튼 닉슨 대통령이 민주당사에 설치하게 했던 도청장치가 문제가 되었고, 월남전 반대 등 진보세력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사임했으며 사건의 이름이 된 워터게이트가 도청을 실시했던 건물이라는 정도. 정치를 주제로 해당 인물을 둘러싼 인터뷰를 다룬 드라마이지만 마치 하나의 전쟁, 아니 하나의 전투(Battle) 영화를 보고난 느낌이다. 미디어가 가지는 힘의 논리, 하나의 방송을 이루는 데 있어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잡다한 요소들을 적절하게 정돈하면서 1977년 미국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생생하게 보여진다.

찰리 쉰은 6,70년대의 전형적인 영국미남의 얼굴과 분위기를 가졌다. 그가 연기한 프로스트는 내면적인 깊이와 갈등이 잘 드러나지는 않았지만(물론 그런 것에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인물이긴 하다.) 어차피 정치를 다룬 드라마 영화에서는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다. 오히려 닉슨을 연기한 프랭크 란젤라는 잘 알려진 닉슨 대통령의 내면을 연기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도 이 배우의 팬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연기를 해내었다. 영화 자체가 이미 프로스트와 닉슨을 대상으로 한 하나의 픽션 인터뷰지만 역시 극의 특성상 닉슨에 대해 더 촛점이 맞춰져 있다. 전체적인 흐름도 닉슨을 악으로 규정하기보다는 프로스트의 성공에 있어 꺾어야 할 강력한 챔피언과 같은 호적수로 여겨지게 만든다.

프로스트는 처음에는 생각없이 재기에 대한 열망으로 닉슨과의 인터뷰를 시도한다. (사실 닉슨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추궁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어떻게 사임연설만으로 모든 잘못을 벗어나게 되었는지 궁금할 뿐이다.)이 점은 닉슨 역시 마찬가지다. 대통령을 사임한 후 상처를 이기고 다시 화려하게 정계복귀를 이루려는 닉슨의 바램은 프로스트와 함께 맞춤가락으로 들어맞는다. 하지만 둘의 의도와는 달리 세상은 그들의 인터뷰의 불순함을 꿰뚫어보고 신뢰를 버린다. 4일간의 인터뷰 중 3일동안은 모두의 예상대로 흘러간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자신만만한 프로스트의 태도를 보면서 저렇게 굴러떨어지면서도 뭔가 믿는 구석이 있겠지 하는 이상한 기대마저 품게 되지만, 실제로는 무모함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 그를 바꾼 것은 한밤중에 벌어졌던 닉슨과의 한 번의 통화. 사람들의 비판대로 토크쇼 진행자에 코미디언 출신인 프로스트는 그 통화 이후로 각성과 함께 제대로 된 반격을 준비하는 인터뷰어의 모습으로 재탄생한다. 마치 가볍고 실없는 TV진행자가 성숙한 인터뷰어로 성장해나가는 성장영화를 보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도 했다. 가장 중요한 전투 앞에서 상대의 사기를 꺾으려던 닉슨의 시도(그것이 고의였는지 술에 취해 저지른 실수였는지는 영화 마지막에 둘의 대화를 볼 때 의구심으로 남는다. 어쩌면 워터게이트에서의 닉슨의 패착 역시 역사의 판단을 배제한 그만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실수'보다 좀더 강한 표현을 요구한 프로스트의 질문에 대한 닉슨의 대답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사실 4일간의 인터뷰는 닉슨의 5년간의 집권과도 일맥상통하며 궤를 같이 한다. 케네디와의 TV쇼에서 패했다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위기를 맞았다가 닉슨독트린으로 승승장구하던 60년대는 인터뷰 1일에서 3일까지의 행적과 유사하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닉슨 그 자신조차도 흐릿한 기억으로 기억하던 한밤의 통화는 워터게이트를 지시했던 1972년 닉슨의 내면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스트를 위시한 인터뷰 팀과 닉슨을 둘러싼 보좌진이 어떤 이들을 대표하는지는 명백하다. 포드와 카터로 이어지는 미국의 뒤이은 70년대를 생각해보면 더욱 그렇다.



프로스트가 닉슨을 인터뷰하는 장면

하지만 일련의 전투와도 같이 여겨지는 인터뷰의 끝에서도 패배자는 없다. 마지막 날 TV화면에 닉슨의 일그러진 표정이 나타나면서 사람들은 만족감을 느낄 테지만, 프로스트의 팀원인 제임스 레스턴의 말대로 TV는 하나의 씬을 둘러싼 다양한 요소들을 배제한 채 단지 몇 가지 이미지로만 함축적으로만 보여줄 뿐이다. 샴페인을 터뜨리는 동료들과 달리 프로스트의 얼굴에는 떠나가는 대통령에 대해 적을 이긴 승리감과 달리 하나의 인간을 이해하는 듯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마지막 장면에서도 닉슨은 결코 추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쓸쓸한 뒷모습이 나타나긴 하지만 프로스트를 최고의 적수로 인정하고 패배를 인정하는 모습에서 굴욕은 느껴지지 않는다. 정계복귀라는 욕망을 버리고 마음의 자유를 얻은 노정객의 모습만이 느껴질 뿐이다.

결국 정치라는 것도 인간이 만들어내는 일이다. 물론 결코 닉슨이 저지른 일을 인간의 행위라는 이유로 면제부를 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정치적 사건이 일어날 때 대결구도를 형성하고 갈등과 증오를 불러일으키며 전쟁으로 만들어나가는 일이 과연 의미있는 일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만하다. 정치를 이해하는 데에서는 전투의 맥락으로 바라보는 것이 이해하기 쉬워보이지만, 또 그것을 의도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이야기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故 닉슨

p.s) 그런데 프로스트는 닉슨에게 이탈리아산 구두 말고 남은 인터뷰비 잔금 40만 달러를 건넸는지... 그냥 구두로 퉁친 건 아니겠지..ㄷㄷㄷ


나름대로 평점 : ★★★☆ (별 다섯 개 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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