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미쓰 홍당무

영화보기 2008. 10. 25. 06:43


공효진의 시뻘겋고 험상궂은 얼굴이 화면 전체를 가득채운 포스터와 한구석에 써있는 텍스트를 처음에 봤을 때엔  '또 그렇고 그런 영화구나'라고 지레짐작했었지만 실제 영화는 그와는 조금 달랐다. 물론 한국영화에서 공효진이라는 캐릭터가 가지는 분위기와 무게는 단순한 코미디영화와는 거리가 있긴 하다. (난 공효진이 자기 이미지 관리를 가장 잘 하는 배우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아니 관리라기보다는 구축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랐다고 해도 이 영화가 좋았다거나 공감했다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한마디로 '괴작'이다. 괴작은 좋은 의미와 안좋은 의미 양쪽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단어이다. 이러한 종류의 단어들은 선택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취향과 선호도에 따라 이후 이어지는 평이 상이하게 달라지게 마련이다.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은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에 대한 연민과 따스한 시선을 영화가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수작이라고 평하고 있다. 물론 그 대척점에 서있는 사람들도 많다. 영화를 진지하게 보지 않은 이상은 '괴상한 민폐캐릭터가 나오는 쓰레기영화' 이상으로 이해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괴작으로 부르려는 이유는 기존의 한국영화에서 쓰이지 않았던 방식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쉽게 떠올려볼때 재작년에 개봉한 미녀는 괴로워를 비슷한 영화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전형적이고 재미있는 신데렐라 스토리. <미쓰 홍당무>를 보러간 관객 중 일부는 어쩌면 그런 스토리를 기대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가 막을 내리는 순간까지 캐릭터가 위치하는 지점은 크게 변화된 바가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좌절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또한 마지막 장면이 시사하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런 캐릭터가 어려운 현실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아를 발견하고 극복했다고 단정지어 말하기도 어렵다. 박찬욱의 냄새가 짙게 떠도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의 영화에서 캐릭터들은 상황의 큰 반전을 이루지 않는다. 내면의 작은 조각들이 변화하기는 하지만 영화의 끝은 항상 씁쓸하고 처절하다. 장황한 이야기 속에서 피어오르던 관객들의 기대를 허문다. 김기덕의 영화들과는 또다른 처절함이다.

박찬욱이 제작하였기에 더욱 화제가 되었던 영화이다. 개인적으로 보면 박찬욱이 <친절한 금자씨>와 <사이보그라도 괜찮아>를 잇는 여성적 영화라인 선상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한계를 느끼고 이를 돌파하기 위해 여성감독에게 자신의 잔여작업을 맡긴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배경이 되는 여학교의 음울한 분위기와 또한 어설픈 공연장면 및 체육복 등으로 상징되는 장면들은 사실 여성감독이 아니고서는 표현하기가 어려운 것들이다. 욕먹어 마땅한 캐릭터에 연민을 불러주는 것도 역시 여성감독, 특히 신인여성감독이기에 더 잘 이루어졌다고 여겨진다.

아지알릴로비치 감독의 <이노상스>에 필적할 정도로 수많은 상징들로 반짝이고 있지만 가히 유쾌하지만은 않다. 예컨대 공효진이 초반부터 파헤치는 구덩이의 경우 예쁜 애들을 묻어버리기 위한 작업으로 사실 그 의미를 파악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비상식적인 행위의 결과이지만, 그 의도와는 달리 하는 행동은 '삽질'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지닌 행위이다. '이 영화는 예쁘고 잘나가는 사람들을 묻어버리고 복수하려는 내용이다다'라고 영화 초입부터 선언하고 있지만, 사실 그 본질은 수없는 삽질이라는 말이다. 쓰디쓴 블랙코미디는 초반부터 은근하게 선보인다.

이어지는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정신줄을 놓게 만든다. 기본적으로 부여되는 연민을 배제하고 볼 때, 사실 양미숙은 교사가 되기에는 품격미달의 인간이다. 드물디드문 러시아어 선생이라는 캐릭터를 잡은 이유는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중등교과 러시아어 교사는 수요가 많지 않긴 하지만, 공급 역시 찾기가 어려운 직업이다. 학창시절부터 짝사랑한 선생과 같은 학교에 동료로 들어가는 상황설정은 찐따캐릭터의 목표달성을 보여주지만 그러한 달성은 또다른 괴로움으로 이어질 뿐이다. 이유리의 등장으로 서종희와 모의를 꾸미고 그 와중에 벌어지는 온갖 소동들과 난리법석들, 그리고 후반부에 은교의 주도로 이어지는 어학실 장면까지 영화는 웃음과 쓴웃음을 반복해서 제공한다. 물론 거기에 도덕적이라거나 윤리적이라거나 하는 기준을 대기는 어렵다. 애초에 그런 것 자체가 배제되어 있는 사차원 캐릭터의 이야기니까. 외부에서 볼 때엔 살짝 맛이 간 민폐가득 캐릭터이지만, 그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기 시작하면 요란뻑쩍하기는 해도 나름의 질서가 부여된다. 하지만 한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면, 즉 어학실과 같이 정신차리고 모든 게 까발려지는 순간이 오면, 열심히 열심히 뭔가를 했던 찐따들의 노력은 종국에는 삽질 그 이상이 아니었음이 밝혀진다. 계단 씬에서 서종희가 울먹이면서 '그게 다야~~?'라고 한 말이나 그동안 양미숙이 억지로 부인해오던 서종혁의 진심을 직접 그 입으로 들었을 때 핸드폰을 놓치는 장면 등은 우스우면서도 마음의 울림을 안겨줄 정도로 애처롭다. 정신없는 줄거리 속에서도 나중에 알고보면 질서와 합리성과 목표의식이 확고해져 가는 일반 범죄영화와 달리 갈수록 해체를 향해 달려가는, 정반대의 노선을 걷고 있으니 이 얼마나 괴작스러운가.

많은 이들이 캐릭터에 공감하였다고 하지만, 난 글쎄. 비주류의 인생을 다루었다고 들이대고 있지만, 실제로 그것이 비주류의 삶을 고민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왜 비주류의 삶은 고민되어야 하냐고 물으면 할말은 없고, 그냥 영화를 보며 공감할 수 있지 않냐는 말에도 딱히 할말은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졸업사진을 찍을 때 점프하는 씬은 정말 좋았다.) 양미숙에 정말 공감하기 어려웠던 이유는 자신만의 특징을 가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의 인생은 계속 누군가를 증오하면서도 따라하려는 슬픈 동일시로 점철되어 있다. 비호감이고 민폐캐릭터임에도 주관이 뚜렷하거나 목표의식이 있는 인물에는 공감이 되지만, 흐릿한 채로 타인을 모방이나 하면서 착각 속에 빠려 허우적대는, 그러면서도 할 말은 다하는 게 당당하다고 생각하는 캐릭터는 정말 다른 의미에서 비호감이다. 게다가 어학실 장면에서 앞으로 그러면 어떻게 할 지 생각해본 적 있냐는 질문에 '제가 그동안 좀 바빠서요...'라고 하는 장면에서는 거의 욕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나의 내면에 담겨있는 약한 모습이 영상으로 표출되고 있음을 보고 느껴진 불편함이었을지도 모르지. 하하. 아무튼 그런 여자가 주위에 있으면 그냥 한 대 때려줬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때리는 사람이 아닌 맞는 사람의 입장에 만들어진 영화라는 건 어쩔 수 없이 이 렇게 나올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좀 복잡하군.

서종희 역시 왕따이다. 그러나 왕따가 모두 순진하거나 나약하거나 한 건 아니다. 그들에게도 나름대로의 질서와 규칙이라는 건 존재하고, 나름대로의 강함도 갖추고 있다. 양미숙의 채팅창을 뺏어서 메신저를 하는 서종희의 표정, 아니 서우의 연기는 일품이다. 그러나 역시 어색함을 가리기는 어렵다. 특이한 캐릭터로 승부하고 있지만, 이 배우의 차기작을 한번더 지켜봐야 할 듯 하다. (사실 그녀는 왕년의 옥메와까 걸이다.)


 이종혁이 연기한 멍때리는 연기 역시 받아들이기 어려운 캐릭터이다. 이 사람은 자신의 방송을 운영할 정도로 주체성이 있어보이지만, 알고 보면 어설픔과 되는대로 사는 점에서는 앞의 두 캐릭터와 다를 바도 없다. 8년 연상의 깁스환자에게 낚여서 결혼까지 하게 된 것부터 시작하여 사건의 빌미를 끊임없이 제공하는 무저항과 무력함의 이 사나이 역시 원펀치 쓰리강냉이를 맞아도 쌀만한 인물이다. 연민은 없다. 이유리는 전형적인 캐릭터이다. 다만 황우슬혜가 순진한 장면에서 너무 어설프게 순진했다든지 하는 코맹맹이 연기 때문에 몰입이 어려웠을 뿐이다. 나중에 서종희와의 통화에서 독살스러운 모습에서도 어설픈 모습을 보여주는데 젊은 시절의 엄정화가 자꾸 아쉬웠던 것은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화에서 황우슬혜는 오히려 '엄지원은 엄지원인데 연기못하는 엄지원'이었다. 쉬크한 방은진은 간만에 영화에 등장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8년 연하의 병원알바를 8인병실에서 꼬신 전력이 있는 캐릭터가 이 흙탕물에서 중심을 잡고 완벽히 통제하기란 쉬운일은 아님을 보여주었다. 딸에게 집에가서 말해준다고 했던 그 자세가 어떤 것인지 궁금할 뿐이다. ㅋㅋ

괴작. 괴작. 아 진짜 불편했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 좀더 세련되고 가다듬으면 유럽의 비슷한 블랙코미디 영화나 혹은 문제제기 영화들을 따라잡을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극복의 과정이 아니라 그냥 살아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허무와 일탈을 괴상한 캐릭터들을 동원해서 볼 때 그 재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다만 이 영화에서는 그 보여주는 방식에서 여러가지 덜컹거리는 과도함이 보였다. 상황의 설정, 그리고 여주인공들을 내세워서 얘기하고 있는 전형 덕분에 내려지는 좋은 평가들이 가지고 있는 맹점들이 아쉽지만, 그 역시 어쩔수없는 그들의 몫일 것이고 또 영화의 타겟일지도 모른다.


p.s) 이 영화에서조차 공효진이 예쁘다는 어이없는 평가를 내리는 더이상 어쩔수없는 xxx들에 대해서는 '에라이~'라는 얘기밖에 해줄 게 없다. 아니 도대체 못생긴 애들한테 예쁘다고 해서 그만큼 자신의 외모를 상대적으로 격상시키려는 의도인지 어쩐지 몰라도, '외모를 떠나서 아름다운 사람' 차원이 아닌 그냥 예쁘다는 말에는 여자들이 서로에게 '엄훠엄훠 너 오늘 넘 예쁘다~~' 어쩌구 하는 가식과 위선이 느껴질 뿐이다. 공효진 안 예쁘다. 이 영화가 아닐지라도.



(나름대로의 평점 : ★★, 5개 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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