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그랜 토리노

영화보기 2009. 4. 12. 12:46


포스터에 나타난 무시무시한 자태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한국전쟁 당시에 쓰던 M1 소총을 들고 있는 그의 결연한 모습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에 휴식하지 못하고 있는 노병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전쟁에서 얻은 상처와 죄책감으로 인해 삶의 전반에 있어 고집불통에 인종차별적인데다가 타협할 줄 모르는 깐깐한 인생역정(?)은 영화 전반에 있어서 잘 드러난다. 거기에 포드사의 72년형 그랜 토리노는 아시아의 자동차산업에 밀려서 점차 퇴물로 밀려나고 있는 미국의 자동차산업 및 불안한 경제현실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고 있는 미국적인 가치를 나타낸다. 이스트우드스러운 여러가지 상징들.

하지만 이스트우드가 미국의 가치만을 강조하는 극우 민족주의자가 아님은 영화를 조금만 보아도 알게 된다. <아버지의 깃발>에서도 그랬듯이 미국의 가치를 이야기하면서도 내면에 자리잡은 모순과 이야기하기 꺼려지는 어두운 면을 부드럽게 소화해가면서 묘사해내는 솜씨는 일품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미시간 주에 위치한 작은 마을(아마 디트로이트 인근일 것이다.)에서 이주민들에게 밀려나는 백인 가족의 모습은 위기에 빠져있는 기존의 전통적인 미국 중산층을 대변하고 있다. 이 곳에서의 범죄는 어두운 뒷골목이나 음습한 지하실이 아닌 백주 대낮에 길거리에서 발생한다. 위태로운 미국 사회를 다룬 영화는 몇십년전부터 이야기되고 있지만, 이 영화에서 괄목할 만한 점은 타자를 등장시키고 대비함으로써 과연 미국이라는 나라가 현재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재조명해보았다는 점이다. 중국의 소수민족인 몽족의 인물들을 대척점에 두고 초반에 갈등을 인물과 관계의 측면에서 조금씩 풀어나가며 이스트우드는 오히려 인종의 문제에서 초탈하고 카톨릭과 미국의 이름아래에 경건하게 순교하고자 한다. 소위 '위대한 보수'의 사명이 스크린 위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마음에 안드는 일에는 으르렁거리는 신음으로 시작하며 일그러진 표정, 거침없이 내뱉는 독설, 거친 태도와 대응. 코왈스키는 말 그대로 고집불통에 성격 더러운 꼰대 늙은이이다. (그의 으르렁거림은 거의 습관처럼 되어 있는데 이거 은근히 매력적이다.) 주변을 잠식해가는 이주민족들에 열받아하며 매일 잔디를 깎는 그는 나이든 리트리버만을 옆에 끼고 맥주를 밥삼아 먹으며 중국인들의 오지랖과 전통을 귀찮고 야만적으로만 여긴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켜야 하는 것에 대한 신념이 있고 이러한 대전제 하에서는 인종이나 성별을 초탈하여 고집을 접고 마음을 열 줄 아는 건전함을 가지고 있다. 그의 두 아들과 손주들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듯이 오히려 이러한 건전함(?)은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어찌 보면 불편함일 것이다. 지켜야 할 것을 지켜나가는 사람, 그것도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에게 세상은 심술궂음의 대상이자 불평불만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다.



내 땅에서 나가...

하지만 그의 이런 삶에 변화를 주는 사건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웃집 몽족 가족에게 가해진 테러로부터 비롯된다. 의도하지 않게 그들을 보호하게 되었고 관심받고 영웅으로 추앙받게 되면서, 또 몽족 내부에서 소외받고 있던 한 명의 소년을 받아들이면서부터 그의 습관은 바뀌게 된다. 어찌보면 그의 심리의 기저를 이루는 한국전쟁에서의 경험은 아시아인들을 미워하게 되는 동시에 그들에 대한 깊은 죄책감도 동시에 만들어냈을 것이다. 자신이 쏘아죽인 중국 소년병에 대한 죄책감을 몽족 소년인 타오를 통해 보상함으로써 비로소 마음의 평온을 얻어가게 된다. 후에 성당에서 고해성사를 할 때에 그는 한국전쟁에서 죽인 13명의 병사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명령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죽임이었기에 더욱 괴로웠지만, 삶을 관통하던 원칙을 스스로 깨고 타오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는 이미 스스로를 마음 속으로부터 용서한 것이다.

자칫 무겁게만 흘러갈 수 있는 영화의 흐름을 중간중간 농담과 유머를 곁들여서 전환과 포인트를 넣은 것은 이스트우드의 또하나의 빼어난 솜씨이다. 이탈리아 이발사나 아일랜드 건축십장과 같은 친구들과의 장면은 미개한 몽족 소년을 가르치려는 코왈스키의 뼛속깊은 보수성을 나타내주면서도 긴장을 푸는 완화제 역할을 한다. 그러면서도 신부와의 대화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하여 논함으로써 진지함을 이어나간다. (이 부분에서 영화의 결말을 나타내는 복선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또한 몽족 갱단이나 동네 흑인 양아치들에 대해 노구에도 불구하고 정면으로 들이대는 모습은 이스트우드의 모습을 너무 잘 묘사하고 있다. 영화는 여러가지 면에서 매력적인 요소들로 가득차 있다.


스틸이미지
뱅~ 뱅~!!

영화의 놀라운 결말은 한 인간의, 아니 한 영혼의 위대한 승리를 나타내고 있긴 하지만 이스트우드의 이미지를 극대화시킨 장면이다. 영화 중간중간에 나타나는 그의 캐릭터를 어긋나게 하는 장면들 속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찾아낼 수 있었다면, 결말은 내러티브부터 이미지까지 하나의 잘 만들어진 완벽한 예술품처럼 나타나고 있다. 뭐 어쩔 수 없지. 그는 지켜야 할 것은 지켜나가는 위대한 감독이자 배우니까. 그랜 토리노가 몽족 후계자에게 넘겨졌지만, 그의 가치와 신념은 후계자가 누구든 상관없이 계속 이어져갈 것이라는 믿음과 의지가 확고하게 느껴진다. 무리하지 않고 느긋함과 여유로움을 바탕으로 한 거장의 걸작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p.s) 1. 이런 류의 기존 영화에서 즐겨쓰는 한국전쟁 회상씬이 나올 거라 기대했지만 전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더 좋았던 듯. 
   
       2. 몽족은 중국에서 흔히 말해지는 묘(苗)족이다. 베트남과 라오스 지역에 사는 산악 민족... 
          이들을 등장시킴으로써 한국전쟁으로부터 월남전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과거를 속죄하려는 것은 아니었는지.

몽족의 근거지 및 몽족 전통의상

나름대로 평점 : ☆☆☆☆ (별 다섯 개 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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