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병의 등장과 대처의 집권 - 영국의 현대화

역사보기 2008. 9. 22. 22:37

전후 사회 혼란

대처의 집권 성공 과정은 영국경제의 위기라고 하는 위기적 시대상황의 존재, 정치권의 위기대응 실패, 대처의 신념과 리더십등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로 대처가 집권하게 된 것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만연한 영국경제의 추락과 낮은 생산성, 높은 인플레이션, 과격한 노조로 인한 영국경제의 경쟁력 하락등의 위기적 상황이 그 배경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와중에서 총리를 역임했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보수당(Conservative), 노동당(Labor), 진보당(Liberal) 등 세가지 정당의 지도자를 포함하는 연합정부(coalition government)를 형성했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난 후에도 처칠은 일본과의 전쟁을 완료하기 위하여 연합정부를 계속 유지하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노동당은 이를 거부했다. 한편 국민들의 여론은 영국이 평화상태에서 운영되는 것이 필요하며, 선거를 개최할 것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이에 따라 1945년 6월 선거가 열린다. 하지만 처칠은 영국의 어두운 시기에 리더십을 발휘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전후에는 영국국민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다. 영국 국민들은 처칠이 2차 세계대전이후 영국국민들의 열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지도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에 반해 노동당은 구체적인 강령을 제시했다. 노동당은 영국국민들에게 계획경제(planned economy), 주요 산업의 국유화, 완전고용, 대대적인 주택건설, 국가적인 건강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종합적인 사회보장시스템(comprehensive system of social security)을 약속했다. 이에 반해 보수당은 사회주의의 위험에 대한 공격에 치중한 나머지 2차 세계대전이후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노동당 정권의 등장

보수당의 비전 상실로 노동당은 하원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함으로써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이러한 노동당의 승리뒤에는 1930년대의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영국 국민들의 경험도 함께 작용했다. 우선 1930년대의 대공황(Great Depression)의 경험을 통해 영국국민들은 자본주의와 민간기업이 자신들에게 복지를 가져다 주는데 실패했다고 믿게 되었다.한편, 2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통해, 영국국민들은 정부가 국가적 목적을 위해 자원을 동원하고 이를 조직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영국국민들의 경험은 노동당이 제시하는 아젠다가 보다 타당하다고 믿게 만든 것이다. 당시 노동당의 지지자는 크게 두개의 그룹으로 나뉘었는데, 하나는 교육수준이 높은 중산층 사회주의자였고, 다른 하나는 노조였다.

노동당의 주요 정책은 1) 계획경제, 2)국유화, 3)노조와의 연대, 4) 복지국가등을 들 수 있는데, 향후 등장하는 대처의 정책은 노동당의 정책과 매우 다르다고 볼 수 있으므로, 먼저 노동당의 주요정책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첫째로, 노동당의 정책은 계획(planning)에 근간을 두었는데, 당시 대부분의 영국사람들은 계획경제가 1930년의 대공황에서 나타난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의 실패를 대체할 수 있는 우월한 체제라고 믿었다. 노동당은 이러한 계획경제를 통해 2차 세계대전이후 파괴된 영국산업을 재건하고, 실패한 민간기업을 근대화하는데 최우선순위를 두었다.

둘째로, 노동당은 이러한 계획경제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주요 산업을 국유화(national ownership of major industries)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한편 국유화는 노동자들이 경영자 또는 주주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공익을 위해서 일한다는 인식을 갖도록 함으로써 노사관계를 개선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 과정에서 準公益機關으로 운영되어 오던 영국은행(Bank of England)의 경우도 정부가 통화량 및 신용에 대한 통제를 보다 용이하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국유화되었다. 전국에 산재하여 잇고 비효율적인 鑛産業도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인점을 감안하여 국유화되었다. 그 밖에 철도, 전력, 가스, 항구, 버스, 장거리 화물등이 국유화되었다. 철강산업은 1951년에 국유화되었다.

그 결과 노동당 시절 국유화된 기업은 전체의 20퍼센트에 달했다. 국유화된 산업의 지배구조는 이사회(boards)가 통제하는 회사의 형태로 운영되도록 함으로써 기업성의 추구와 함께 공익성을 조화시키도록 시도하였다. 실제로는 장관들이 공기업의 운영에 자주 개입했으며, 몇몇 기업들은 재무부로부터의 보조금에 많은 의존을 하였다. 하지만 노동당 정부는 공기업의 효율화에 필요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지 못했으며, 전후 발생한 다양한 문제들의 처리에 신경을 쓴 나머지 공기업의 효율화에는 많은 노력을 쏟을 수가 없었다.

셋째로, 노동당의 중앙집권적인 경제관리는 노동당의 터전이라고 할 수 있는 노조의 협력을 필요로 했다. 그 반대급부로 노동당은 완전고용(full employment)과 노후 보장을 위한 사회보장 프로그램을 통해 노조와 협력했다. 영국의 노동운동은 수백개의 직장조합(craft unions)으로 분산되어 이루어졌으며, 직장 조합은 Traders Union Congress(TUC)라는 우산조직(umbrella organization)아래 느슨한 상태로 연결되어 있었다. 노동당이 정부권력을 장악한 이후 노조는 정치과정에서 적극적인 참여자로 활동했고, 노동당의 주도세력이었으며, 노동당 정부의 공공정책을 형성하는 데에 적극 참여했다.

넷째로, 복지국가(welfare state)의 구축은 노동당 정책중에서 성공한 분야중의 하나였다. 복지국가의 확충은 크게 연금제도, 건강보호제도, 주택정책, 교육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우선 고용자와 근로자가 내는 기여금(contributions)을 바탕으로 하는 국가보험시스템은 실업, 질병, 은퇴, 사망등에 대응하여 편익(benefits)을 제공했고, 다른 사유로 국가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경우에는 일정한 수준이하의 재산을 보유한 사람에 대해 지원하는 국가지원 프로그램(means tested program of national assistance)을 도입했다. 또한 노동당은 모든 사람을 위한 건강보호를 약속했는데, 국가건강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NHS)를 설립함으로써 이러한 약속을 이행했다. NHS는 전국의 의료시설을 인수하여, 무료 의료, 치과, 병원서비스를 제공했고, 약과, 안경등도 무료로 지급했다. 개인들은 가족의사(family doctor)를 등록했으며, 가족의사가 1차적인 의료서비스제공의 책임을 지고, 필요할 경우 특수한 분야의 의사를 연결시켜주는 역할도 담당했다. 의사들은 자신이 속한 병원의 시설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과 환자 치료비에 대한 정액을 국가로부터 지원받았다. 한편 전국에 있는 단위 병원들은 정부의 일반회계예산을 통해 모두 국유화되고, 지역병원이사회(regional hospital board)에 의해 통제되었다. 여러 가지 미흡한 점이 있었으나, NHS시스템은 민간병원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보다는 국민들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어서 성공한 건강보호시스템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후 가장 시급한 문제중의 하나는 주택의 확충이었다. 전쟁이전부터 영국의 주택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았는데, 전쟁으로 인해 많은 집들이 파괴됨에 따라 주택문제는 국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어 있었다. 노동당 정부는 지방정부(local authorities)가 짓는 공영주택(council houses)에 보조금을 지급하였다. 이 공영주택의 질은 당시 기준으로는 훌륭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였다.

교육정책은 노동당정부에서 다소 소홀한 분야중 하나였다. 1944년 전시연합정부가 통과시킨 교육법(The Education Act of 1944)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16세까지의 무료 초등교육(primary education)과 중등교육(secondary education)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는 학교건물의 부족과 노동당 정부가 주택 및 병원건설에 대한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했던 것등으로 인한 영향으로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한편 노동당내에서는 학교들의 계급지향(class orientation)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보통은 11세에 시험을 통하여 학교가 차별화되었는데, 이는 중산층과 근로자계층의 자녀를 분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많은 노동당 지도자들은 이를 유지하고 확대하기를 원했다. 한편 다른 사람들은 모든 아이들이 함께 다닐수 있는 소위 종합학교(comprehensive school)시스템이 계급의식을 철폐하는데 도움이 되므로 이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교육시스템과 관련한 논쟁은 아직까지도 노동당내에서 벌어지고 있다.

보수당의 재집권

처칠은 노동당의 정권장악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영국국민들의 국민적 단결(national unity)을 재현하기를 원했다. 처칠과 보수당(Conservative Party)은 중앙집권적인 계획, 완전고용, 노조와의 협력등 노동당이 주장해오던 정책의 상당부분을 받아들이고 이후 두 번의 선거에서 계속 승리한다. 한편 처칠은 1955년 은퇴하고, 2차세계대전당시 외무부장관이던 Anthony Eden이 처칠의 자리를 이어 받는다. 한편 1956년에는 Eden은 위기를 맞이한다. 이집트의 지도자인 가말 압둘 나세르(Gamal Abdul Nasser)는 영국과 중동을 연결하는 핵심 관문인 수에즈 운하(Sueze canal)를 국유화한다. 이스라엘은 영국과 프랑스와의 협조하에 이집트를 공격하지만, 미국과 UN은 이러한 이집트 공격을 비난하고 결국은 후퇴한다. 그 여파로 Eden은 사임하고 Harold Macmillan이 이를 승계한다. Macmillan은 1930년대에 레세이페어(laissez-faire)라고 불리는 자유방임형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중간적인 입장(middle way)를 옹호했던 인물이다. 맥밀란은 하나의 국가 (One Nation)라는 디즈레일리의 토리주의(Toryism of Disraeli)를 주장했다. 맥밀란은 텔레비전을 잘 활용한 영국 최초의 정치인이었다. 침착하고 자신있는 이미지로 인터뷰와 토크 쇼에 임했으며, 유권자들에게 "당신들은 여태까지 좋은 정부를 가져보지 못했습니다(You've never had it so good.)”라고 환기시켰다. 그 결과 보수당은 전체 투표의 약 50퍼센트를 득표하고 하원(House of Commons)에서 다수당의 자리를 차지한다.

한편 맥밀란 총리의 시대는 1963년 종말을 고한다. 맥밀란은 건강의 악화로 인해 총리직과 보수당 당수의 자리를 사임하기로 결심하고 후임자로 외무부 장관인 얼 흄(Earl Home)(흄이라고 발음)을 후임자로 지명한다. 흄은 그 다음해 선거를 실시한다. 하지만 영국에 기술혁명의 白熱(white eat of technological revolution)을 가져올 것을 약속한 당시 48세의 Harold Wilson이 이끄는 노동당에게 아깝게 패배한다. 한편 대처는 보수당 정권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핀츨리 선거구에서 다시 당선된다.

한편 윌슨은 2차세계대전이후 노동당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노동당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윌슨은 철강산업을 다시 국유화하면서 전통적인 노동당 열성지지자들의 지지를 획득했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여건을 감안하여 사양산업에 대한 보호정책을 추진하는 노동당의 기존 노선에서 벗어나 엔지니어링, 항공과 같은 첨단산업육성정책을 적극적으로 펴나갔다. 또한 블루칼라 근로자들에 추가하여 화이트 칼라 근로자와 서비스업종사자들의 노동당 지지도를 높이는데 전력했다.

당시 영국의 근대화는 더욱 높은 수준의 교육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보수당정부에 의해서 시작되었던 “로빈스 리포트(Robbins Report 1964)"는 자질이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고등교육에 대한 공공투자의 확대를 요구했다. 이러한 권고는 보수당 뿐만 아니라 노동당도 수용이 가능한 제안이었고, 노동당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대학을 적극적으로 확충해 나갔다. 그 결과 1960년대말에는 대학의 숫자가 약 75퍼센트 증가했다. 윌슨 총리는 특히 경력지향적(career-oriented) 프로그램을 가르치는 고등교육기관인 폴리테크닉(polytechnic)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으며, 근로자들이 통신, 라디오, Tv등을 통하여 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하는 개방대학(Open University) 도입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윌슨은 경제성장의 기반으로서의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교육과학부(Department of Education and Science)를 설립하였다. 윌슨총리는 또한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의 관점에서 복지국가를 위한 정책들을 강화했다. 연금, 가족수당, 보완적 편익(supplementary benefit) 등을 확대했고, NHS(National Health Service)에 대한 지원도 늘려갔다. 한편 고층아파트를 건설함으로서 현대적 주택의 공급을 늘렸는데, 이는 후에 빈민 슬럼가로 변하게 된다.

한편 국유화된 산업과 노조의 경우는 점차 비난을 받게 되는데, 그 이유는 낮은 생산성과 임금인상때문이었다. 특히 제조업분야는 경영 미숙, 노조의 과도한 임금인상 요구등으로 어려움에 처한다. 그 결과 세계의 일터(workshop of the world)라고 세계적인 평가를 받았던 영국은 이제는 영국병(British disease)으로 인해 활력이 떨어진 나라로 다른 국가들의 비판을 받기 시작한다.

윌슨은 노조가 영국이 안고 있는 문제점의 부분적인 원인이라는 인식을 갖게된다. 노조간부(shop stewards)들은 경영진과 마찰이 잦았으며, 심지어는 관할문제와 관련해서 다른 노조조직들과 분쟁이 발생하는 일이 생겼다. 그 결과 전국적인 노조단위나 지도자들이 승인하지 않는 “비공식적인 파업(unofficial strike)”들이 자주 생겼다. 1969년 출간된 "In Place of Strife"라는 저서에서 윌슨은 노사관계(Industrial Relations)에 대한 국가개입을 적극 주장했다. 그는 저서에서 노사관계위원회(Commission on Industrial Relations)로 하여금 노조가 파업을 일으키기전에 중재를 하도록 하고, 전국 노조지도자(national union leaders)의 권한을 강화해서 비공식적인 파업을 자제하도록 하는 한편, 파업은 비밀투표를 통한 근로자들의 승인을 받을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제안의 전제는 근로자들이 파업으로 인한 소득의 감소와 고용안정의 위협으로 인해 파업을 원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노조지도자들의 반대에 따라 그 제안은 실현되지 못한다.

경제상황

1950년대 영국 경제의 붐(boom)은 노동당과 보수당 정권 모두에게 상대적으로 쉬운 정치를 가능하게 만든 측면이 있다. 양당 모두 완전고용을 추구하면서 국가가 국민들에게 다양한 사회보장서비스를 제공할 것을 공약한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이 전제되어야 한다. 경제성장이 있어야만 고용도 창출할 수 있고, 사회보장서비스제공에 필요한 재정수입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정부는 케인즈가 주장해온 총수요관리정책(demand management policy)을 통해 성장을 달성하고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자 했다. 경기가 침체할 때에는 재정지출과 통화공급을 늘림으로써 성장을 촉진하고 경기가 과열되어 인플레이션압력이 있을 경우에는 재정지출과 통화공급을 억제함으로써 경기냉각을 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1960년대초부터 영국경제는 케인즈가 생각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경제는 정부의 재정지출을 충당하기에 충분한 재정수입을 가져올 만큼 빠른 속도로 성장하지 않았고, 그 결과 정부는 막대한 공공부문의 인력에 대한 임금지급, 노령자에 대한 연금지급, 병약자에 대한 건강보호,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기회제공, 무주택자에 대한 주택공급등 자신들이 공약한 사항을 이행하는데에 어려움을 겪게된다. 경제가 취약한 상황에서 정부는 재정지출에 대한 수요를 계속 충당하고자 한다면 세금을 인상하게 되고, 물가가 상승하는 상황에서 근로자의 소득손실을 계속 보상하고자 한다면 임금을 인상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악순환을 가져온다. 임금을 인상할 경우 물가가 상승하고, 물가가 상승할 경우 이는 영국제품의 수출가격을 인상시켜 수출을 떨어뜨린다. 이는 다시 경제성장을 둔화시켜 재정수입을 감소시킨다. 만일 영국경제가 다른 유럽경제와 비슷한 수준의 성장을 달성햇다고 한다면 복지국가(welfare state)의 비용은 충족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경제는 그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영국경제의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떠오른다. William Hitchcok이 쓴 “유럽을 위한 투쟁(The Struggle for Europe)”에서는 이러한 영국병의 원인에 대하여 역사가들이 적어도 다섯가지의 원인을 제시한다고 설명햇다. 여기서 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한다.

첫째로는 케인즈식의 총수요관리정책이 실제로 장기투자와 생산성증가를 억제함으로써 오히려 성장의 문제를 약화시킨 것으로 지적된다. 둘째로, 영국의 사회문화적 요소가 경제발전에 미치는 장기적 영향을 지적한다. 엄격한 계급적 사회와 전제적 정치 엘리트들의 존재는 기업, 과학, 제조업을 억제하는 역할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이윤의 창출은 중산층에게 맡겨진 반면, 정치는 인문교육 위주로만 교육을 받은 지배계급에 맡겨졌고, 그 결과 경제문제에 대한 관심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셋째로는 노조의 호전성이 지적된다. 사실 노조의 호전성 문제는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다. 영국정부는 완전고용을 약속하며 1930년대 대공황의 고통을 국민들에게 다시는 안겨다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완전고용은 노조로 하여금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할 수 있는 힘(leverage)을 제공했다. 노조의 요구는 근로자의 이익을 증대시키기 위한 것으로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정부는 노조의 요구에 반복해서 굴복함으로써 경제의 성장을 결과적으로 더디게 만들었다. 넷째로는 그 당시 영국경제가 영국의 화폐를 기축통화로 사용하는 국가인 소위 “스털링(파운드화의 다른 표현) 지대(Sterling Area)”에 대한 책임을 져야했던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지적된다. 영국사람들은 파운드화를 준비통화(reserve currency)로 사용하는 국가들이 영국상품의 수출을 늘리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 또한 파운드화의 가치를 미국 달러에 연동(peg)시켜 파운드당 2.8불수준을 유지하여야 했다. 이러한 강한 파운드화의 유지정책은 결국 영국상품의 가격을 인상시켜 수출을 억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섯째로 당시 영국에 닥친 국제경제적 위기 또한 영국경제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1973년 발생한 석유금수조치가 대표적인것이었다. 위에서 설명한 여러 가지 요인들로 인해 영국경제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다른 산업국가에 비해 낮은 수준의 성장을 유지했다. 낮은 수준의 성장은 바로 복지국가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매우 어려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영국은 1971년 The Times에서 제기된 것처럼 영국병(British Disease)으로 시름하고 있었으며, 1975년에 Wall Street Journal에 Vermont Royster가 쓴 것처럼 영국은 유럽의 환자(sick man of Europe)로 전락하고 있었다.

대처 집권의 두 번째 원인은 바로 기존 정치권의 대응 실패때문이었다.1970년대는 앞에서 이야기한 영국경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보수당과 노동당 모두 대안을 제시하면서 영국경제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다. 1970년부터 1974년 기간동안 집권한 히스는 취임하면서 자신의 정부는 변화의 정부(government of change)가 될 것을 약속했고, 영국정부를 근대화시키는 문제에 집중할 것을 선언했다. 히스는 노동당이 추진해 온 계획경제, 물가와 임금의 통제에 반대하는 한편, 세금의 인하, 신용통제완화등을 추진했다. 하지만 보수당 히스정부의 “성장을 위한 돌진(dash for growth)"정책은 노동당 윌슨정부가 경험했던것처럼 낮은 생산성과 인플레이션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흔들거린다.

히스의 조세감면과 통화정책에 의해 시장에 풀린 돈은 생산성 있는 투자에 가기 보다는 부동산 투기로 흘러들어갔다. 통화와 신용에 여유가 생기자 사람들은 은행으로부터 융자를 통해 부동산에 투자하기 시작한다. 많은 사람들이 부동산 가격이 지속적으로 상승할 것으로 예상함에 따라 주택가격은 18개월만에 약 50 퍼센트 상승했다. 또한 느슨한 통화정책으로 인하여 풀린 돈은 과도한 소비(consumption binge)를 자극했다. 수입품에 대한 소비는 급증했고, 국제수지는 악화되었으며, 파운드화의 가치는 큰 폭으로 떨어졌다. 경기 붐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자, 히스는 새로운 정책을 포기하고 종전의 국가계획 및 물가통제정책으로 회귀한다. 인플레이션이 9퍼센트를 초과하자 히스는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신념을 버리고 물가와 임금에 대한 법정 통제를 다시 시작함으로써 경제정책의 유턴(U-turn)이 이루어진다. 공공지출은 삭제되고 이자율은 기록적인 13퍼센트까지 상승한다.

물가와 국제수지문제는 다시 1973년 아랍과 이스라엘사이의 전쟁으로 인한 국제 油價의 상승에 의해 더욱 악화된다. 그 결과 영국의 실업인구는 100만명에 달하는 한편, 인플레이션은 24퍼센트에 이르게 된다. 그 결과 경제붐은 멈추고 부동산 시장은 급속히 梗塞되어 주택가격은 큰 폭으로 하락한다. 주택을 담보로 한 융자금액이 주택의 가치보다 높은 경우도 발생한다. 히스는 그동안 윌슨정부가 소위 “서다 가다(stop-go)”하는 정책으로 인해 영국국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고 지적했지만 스스로가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고 영국 국민들로부터 비난 받았다. 히스는 영국경제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노사관계가 근본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 당시 주요한 과제는 조합이 본부의 승인없이 행하는 무모한 파업(wildcat strike)을 막는 일과 전력, 철도 등 기간산업에서 노사간의 계약을 존중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한편 히스정부는 고용자와 근로자의 관계를 규제하는 종합적인 법안인 노사관계법(Industrial Relations Act)을 마련한다. 동 법안에 따르면 노조는 등록을 하도록 하였고, 노동부 장관은 국가적 이익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파업에 대하여 냉각기간(cooling-off period)을 부여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받았다. 파업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노조의 비밀투표를 받도록 의무화했고, 근로자들이 파업의 절차를 위반하였을 때에는 그 손해배상을 위해 노조를 대상으로 소송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히스정부의 이러한 시도는 노조의 파업에 의해 무력화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1972년 이루어진 광산 근로자들의 파업이었다. 당시 광산 근로자들의 임금은 인플레이션 수준만큼 인상되지 못했고, 비효율적인 광산의 폐쇄조치로 인해 실업은 점차 늘어갔다. 아서 스카길(Arthur Scargill)이 이끄는 노조는 다량의 피켓(flying pickets)시위를 통해 광산에서 발전소로 운송되는 석탄의 흐름을 차단했다. 이러한 광산노조원들의 파업은 철도 및 화물트럭 근로자들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들은 석탄의 운송에 협조를 거부하는 방법을 통해 광산노조의 파업을 지원했다.

이러한 노조의 효과적인 파업의 결과 발전소와 산업시설의 가동이 중단될 위기에 놓이게 된다. 파국을 막기 위하여 히스정부는 광산 근로자들의 고충처리를 위한 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회는 대규모의 임금인상을 권고하는 한편, 정부는 이를 수용하게 된다. 한편 히스정부는 지방정부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조치도 실시하는데, 大런던위원회(Greater London Council)와 대도시 카운티(county)로 이루어지는 카운티(county)정부를 일컫는 상위단계(upper-tier)지방정부와 borough라고 불리는 296개의 지방 및 도시지구(rural and urban districts)로 구성되는 지방정부에 대한 2단계시스템(two-tier system)을 확립한다. 지방정부는 도로, 교통, 위생, 학교 및 사회보장서비스 등 중요하고 광범위한 기능을 수행했으며, 전체 공공자금의 약 30퍼센트정도를 소비했다. 대부분의 지방정부의 재원은 재무부가 지원을 했으나, 상당한 부분은 레이츠(rates)라고 불리는 주택 및 상업용 재산에 대한 세금으로 충당했다. 대부분 보수주의자였던 주택소유자들은 레이츠에 대해 많은 불만을 가졌다.

1974년부터 1979년까지 집권한 노동당은 더욱 무능한 모습을 보였다.노동당의 당수인 해롤드 윌슨이 1974년 총리에 재취임했을때, 윌슨은 영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윌슨은 결국 광산근로자들의 파업을 근로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타결했고, 보수당의 히스 총리가 제정했던 노사관계법(Industrial Relations Act)은 폐기되었다. 윌슨은 세계적인 불황과 인플레이션의 와중에서 사회주의 경제의 몰락을 지탱하는 역할을 해야했다. 윌슨은 노동당과 지지세력들에 갇혔고, 당시 노동당은 자본주의를 잠식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창설하려는 급진파에 의하여 장악되었다. 윌슨은 자신의 정당리더십의 기반이 급진파에 있었기 때문에 급진파들의 견해와 다수당의 리더가 필요로 하는 국민들의 여론사이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노동당은 새로운 시대에 발생하는 문제에 대하여 종전의 전통적인 해법을 제시하는데에 집착했다. 국유화된 기업과 실업자보호, 복지국가의 확충을 補助하기 위하여 조세와 정부지출은 인상되었다. 투자의 부족과 낮은 생산성이 영국병의 큰 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은 정부의 개입과 종전의 전략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전자 및 생명공학 산업등 신산업에 대한 투자를 확충하기 위해 국가기업위원회(National Enterprise Board)가 설립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양산업에 대한 지원에 더 많은 자원을 쏟아부었다. 한편 윌슨은 노조의 권한을 강화하는 대신 임금인상을 제한하는 노조와의 "사회협약(social contract)"을 체결함으로써 노조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 다음해의 임금인상율이 평균 30퍼센트에 달하면서 그 방안은 공허한 것이 되었다. 노동당은 또한 복지국가를 위한 제도를 확충하여 물가에 연동하는 퇴직연금지급을 늘리는 한편 소득에 기초를 둔 보완적 연금(supplrmental pension)을 확대하였다. 장애인에 대한 새로운 편익을 제공했으며, 여성들을 위해서는 임신여성에 대한 출산휴가(maternity leave)를 확대하는 한편, 동일노동 동일임금(equal pay for equal work)원칙의 적용을 추진했다. 한편 소득수준에 관계없이 여성들에게 자녀부양에 필요한 편익(child benefit)을 제공하는 등 복지정책의 확대를 추진했다. 1976년 윌슨은 자신의 사임을 발표한다. 윌슨은 노동당의 부활을 견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국가를 위한 윌슨의 처방은 성공과 실패의 분야가 분명하게 엇갈렸다. 복지국가제도를 확충하는 데에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국유화정책에서는 많은 부정적인 평가가 잇따랐다.

윌슨의 뒤를 이어 총리로 취임한 사람은 제임스 캘러한(James Callaghan)이다. 캘러한은 오랫동안 정치에 헌신한 인물이었으나, 캘러한을 둘러싼 정치환경은 험난하기만했다. 1970년대는 1973년과 1979년의 두차례의 석유위기로 인한 국제유가의 상승이 경제의 발목을 잡은 시대였으며, 영국경제는 특별히 어려움을 겪었다. 인플레이션은 다른 산업국가들보다 높았고, 실업자는 100만명이상으로 치솟았으며, 파운드화는 기록적인 최저수준으로 떨어졌다. 유럽경제공동체(European Economic Community : EEC)회원국들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데 경제정책의 최 우선순위를 부여했다. 1978년에 EEC는 ERM(Exchange Rate Mechanism)체제를 도입하여 회원국들이 강력한 독일 마르크화와 각국의 통화를 안정적인 수준으로 연동시키는 방향으로 이자율정책을 운용할 것을 의무화했다. 캘러한 정부는 이러한 ERM체제를 거부하였다. 그 이유는 노동당은 본래 사회주의 경제의 실현을 위해 통화정책에서 외부간섭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운드화의 가치를 부양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nternational Monetary Fund)으로부터 차입을 하는 대가로 긴축적인 통화정책을 채택하도록 강제되었다. 캘러한은 지출을 삭감하고 세금을 인상해야 했으며, 브리티시 피트로울리움(British Petroleum)의 주식을 매각해야했다. 한편 인플레이션율이 연 평균 15퍼센트 수준을 기록하자, 근로자들의 임금요구는 물가상승에 비례하여 증가했다. 캘러한은 노조가 자체적으로 임금인상을 억제한다는 사회계약에도 불구하고 임금통제(wage control)정책을 도입함으로서 필사적으로 경제를 안정화시키기 위하여 노력했다.

처음에는 TUC(Trades Union Congress)는 처음에 임금통제정책에 대한 지지의사를 밝혔으나, 회원노조들의 임금인상요구를 통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1978년에 노동당은 어떠한 형태의 임금에 대한 제한을 거부했고, 캘러한 정부는 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노조와의 협상에서 효과적인 수단이 없는 경영진들은 임금인상을 소비자 가격에 전가시키기 시작했고, 물가상승은 임금인상요구를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 결과 1977년에 실업자는 140만명에 달했고, 산업평화(industrial peace)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노동당의 주장은 무너지게 되었다. 온건파인 캘러한이 노동당 정부를 이끌기는 했지만, 노동당은 사실상 좌파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캘러한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아젠다를 추진하도록 요구했다. 노동당의 사회주의에 대한 공약은 파산한 자동차회사인 브리티시 레이랜드(British Leyland), 항공 및 조선산업의 국유화로 인해 더욱 확대되었다. 한편 국가건강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 : NHS)에 종사하는 모든 의사와 병원이 사적인 의료활동을 하는 것을 금지했고, 국가가 지원하는 국가는 의무적으로 종합학교(comprehensive school)가 될 것을 의무화하였다. 영국경제의 몰락은 대처가 집권하기 직전인 1978년과 1979년에 극심한 양상으로 진전되었다. 경제성장은 멈추었고, 세계경기불황으로 인한 영국경제의 불황은 파업에 의해 더욱 악화되었다. 실업자수는 130만명에 육박했고, 안플레이션이 이러한 문제점들의 근본 원인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인플레이션에 자극을 받은 근로자들은 노동당 정부의 임금인상 가이드 라인을 거부하고, “사회계약(social contract)”은 포드 자동차 회사가 1978년 11월 9주간의 파업끝에 약 16퍼센트의 임금인상을 허용하면서 붕괴되었다. 화물운전자들은 동일한 수준의 임금인상을 요구하면 전국적인 파업을 선언했고, 영국 철도는 하루간의 파업(one-day strike)를 지속적으로 반복함으로써 갈등을 빚었다. 1978년 겨울은 기상조건 또한 혹독하게 추웠으며, 전국에 걸친 폭설로 교통과 통신이 마비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노조의 파업은 전국적으로 벌어졌고, 이러한 시기는 “불만의 겨울(winter of discontent)”로 불리었다.

이러한 불만의 겨울은 인플레이션에 분노한 약 100만명이상의 공공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환자들은 병원 치료가 거부되었고, 학교는 폐쇄되었다. 캘러한 정부는 시대가 캘러한 자신과 노동당에 등을 돌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론조사결과 국민여론은 노동당에 대한 심각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로 새로운 리더십을 주장한 대처 자신이 스스로를 영국 총리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한다.영국경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1970년대의 보수당과 노동당은 그 해결에 실패하고 상황을 악화시킨다. 정부는 문제해결을 위한 아이디어의 고갈상태에 이르르고 무기력하게 노조의 요구에 굴복했다. 언론은 세익스피어의 Richard Ⅲ에 나오는 "지금은 불만의 겨울이다(Now is the winter of our discontent)"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암울한 시대상황을 뵤사했다. 이 시점에서 대처는 영국문제의 해결을 위한 보수당의 당수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1979년의 선거에서 승리한다. 1974년의 선거에서 패배한 보수당은 히스가 더 이상 보수당의 당수로서 자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가 1972년 경제정책을 추진할 때 유턴(U-Turn)을 한 것과 노조와의 대결에서 패배한 것으로 인해 많은 보수당 인사들은 리더십의 교체를 희망하게 된다. 이 시기에 대처는 보수당의 리더십을 장악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히스의 사무실로 직접 가서 “내가 보수당의 리더십을 얻기로 결심했음을 당신에게 말해야만 하겠습니다(I must tell you that I have decided to stand for the leadership)"라고 이야기 한다. 대처의 지지세력은 정당 간부들이 아닌 평의원(backbenchers)들에게서 주로 나왔다. 대처의 지지세력들은 매년마다 선거를 통하여 당수를 다시 선출하는 새로운 당수 선출방식을 도입했다. 보수당 당수 선거에서 대처는 평의원들의 지지를 얻어 1차 투표에서 아깝게 패한다. 하지만 히스는 자신에 대한 지지도가 현저히 하락한 것을 깨닫고 사퇴를 한다. 그 결과 2차투표에서 대처는 새로운 보수당의 당수로서 자리를 차지한다. 대처는 새도우 내각을 구성하면서 보수당 당수 2차 투표에서 자신과 경합을 벌였던 William Whitelaw,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소신이 강한 Geoffrey Howe, 노동당의 국유화정책에 강력한 반대의 목소리를 냈던 Michael Heseltine등을 임명한다. 보수당 당수의 자리를 차지한 대처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정책과 보수당의 강령을 가다듬는다. 대처는 자신이 "농노제로의 길(The Road to Serfdom)“이라는 저서를 통해 경제에서 정부의 간섭은 다른 방법으로 독재주의(authoritarianism)에 이르는 길이라고 비난한 F.A. Hayek의 영향을 받았다고 공언한다. 또한 대처의 경제정책 형성에서는 동료의원인 Keith Joseph이 많은 영향을 미쳤다. 히스정부에서 장관을 역임하면서 조셉은 사회와 경제에 대한 정부의 간섭은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당초 정부가 해결하려고 했던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결국은 더욱더 정부의 개입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셉은 노동당의 집단주의(clollectivism)과 보수당의 가부장주의(paternalism)를 극복하고 영국에 새로운 기업문화를 정착시켜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세금, 지출, 차입을 감면하고 기업과 개인이 자신의 복지를 위해서 더욱 책임을 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조셉은 또한 공기업의 민영화를 통해 경쟁적인 체제하에서 운영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믿었다. 한편 개인과 가족문제에서 조셉은 자유시장경제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한 이유에서 경제적 변화의 가정에서 사회안전망(safety net)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조셉은 이러한 사회안전망이 개인들이 안주하는 장치가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조셉의 중요 관심사는 개인들이 여러 세대동안 빈곤에 허덕이는 빈곤의 순환(cycle of deprivation)을 깨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이러한 빈곤의 순환을 깨기 위해서는 교육의 질을 개선하는 동시에 복지의존도를 종식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하이예크와 조셉의 이론적 아이디어를 유권자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보수당이 수용가능한 제안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대처의 몫이었다. 보수당의 지지는 중산층으로부터 나왔다. 대처는 이러한 중산층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제안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었다. 대처는 범죄에 대한 강력한 대처와 법질서의 확립을 강조했다. 범죄, 마약, 훌리거니즘(hooliganism : 폭력행위)에 대응하여 소위 “전통적인 가치(traditional values)”를 중시하는 한편, 강력한 정부를 확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처는 또한 영국이 더 이상 국제문제에서 주도적인 세력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세계 지도자들과 교류를 넓혔다. 대처는 야당 당수시절 프랑스, 서독, 이태리,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중동, 인도, 싱가폴, 중국, 호주, 뉴질랜드, 미국등 다양한 국가를 방문하였다. 국제문제에서 대처의 주요 관심사는 핵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冷戰(cold war)문제였다. 대처는 유럽의 평화와 세계문제에서 미국의 역할이 필수적이라고 믿었다. 대처는 소련(Soviet Union)이 세계문제에 대해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적으로 생각했다. 대처의 이러한 전투적인 태도로 인해 러시아의 언론으로부터 “철의 여인(Iron Lady)"라는 이름을 얻게 만들었다. 한편 영국경제의 혼란을 둘러싼 정국은 소용돌이를 쳤고 결국 1979년 4월에 의회는 해산되었고 5월에 총선이 실시된다.대처는 선거기간의 연설을 통해 강력한 대외정책과 국방비지출의 증대, 투자촉진을 위한 소득세율의 인하, 공공지출의 축소, 공공부문 임금에 대한 엄격한 제한,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특별한 노력을 공약한다. 대처는 자유기업(free enterprise), 경쟁적인 시장경제(competitive market economy), 노조의 권력제한을 공약으로 내세우며, 노동당을 인플레이션 정당, 파업정당으로 비난한다. 대처는 또한 종합학교를 추진하고 있는 노동당 정부의 정책을 폐기할 것을 약속한다. 대처는 국가에 대한 의존(reliance on state)보다는 개인의 책임(personal responsibility)을 강조한다. 대처는 빅토리아 시대의 중산층 가치(middle class values)를 강조하면서 강력한 가족, 주택 소유권의 확충, 개인 저축, 교육기회의 확대, 법과 질서를 강조한다.

실제 선거운동이 벌어졌을 때 핵심 이슈는 노조의 권력문제였다. 많은 영국국민들은 노조의 권력이 지나치게 강하다고 느꼈으며, 대처는 노조의 권리와 의무사이의 균형을 확보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내비쳤다. 대처는 노조의 특권제한, 피케팅에 대한 제한, 필수 사업장에서의 파업제한등을 입법화할 것을 약속한다. 한편 당시 대처가 속한 보수당내에서는 노조에 대한 강력한 대응이 1974년 보수당 히스정권에서와 같은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했다. 하지만 대처는 당내의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반 노조입장을 견지하였다. 1979년의 선거에서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는 종전의 노동당의 핵심지지세력이었던 숙련 근로자(skilled workers)그룹이 보수당의 지지세력으로 대폭 이동(massive swing)한 것이었다. 숙련 근로자들은 자신들의 숙련된 기술과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바탕으로 중산층의 생활 스타일을 발전시켜왔으며, 자신들이 부담하는 세금과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부담이 지나치게 높다고 생각했다. 숙련노동자 그룹등은 국가적인 통합(national unity)을 추구하는 한편, 일자리를 많이 창출할 수 있는 정부를 원했다. 그들은 노동당내의 급진파들에 충격을 받았고, “불만의 겨울” 동안의 노사혼란과 산업의 파괴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76퍼센트의 투표율과 함께, 보수당이 44퍼센트의 득표율과 43석의 의석을, 노동당이 37퍼센트의 득표율, 진보당(Liberals)이 약 14퍼센트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나머지는 Scottish, Welsh, Northern Ireland Party에 돌아감으로써 보수당이 정권을 장악했다. 대처는 영국이 혼란한 시기에 앞으로 나와 강력한 리더십을 제시했고, 용기와 신념, 정책에 대한 이해를 통해 영국 국민들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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