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회 스웨덴 월드컵 [1958]
(자료제공 : http://www.worldcup.co.kr)
[6th Sweden-1958] | ||||||||||||||||||
'펠레를 위한 월드컵'이라 할 정도로 당시 18세의 소년 펠레가 혜성처럼 등장하여 '축구황제'로서의 활약을 보이기 시작한 대회였다. 조별 예선 뒤 8강 토너먼트를 벌이는 방식이었으나 득실차 등이 없어서 승점이 같은 2위는 '순위 결정전'을 따로 치뤄야만 했다. 펠레의 대활약으로 브라질이 개최국 스웨덴을 꺾고 우승하며 브라질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대회의 득점왕인 프랑스의 쥐스트 퐁텐은 13골을 기록했으며 이 기록은 지금도 1대회 개인최다 득점으로 남아 있다. [Stars] Pele(본명 : Edson Arentes do Nascimento (브라질) 그가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라는 말에 이견을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1977년 '축구의 불모지' 미국이 프로축구리그를 창설하면서 축구 열기가 지펴졌을 때 뉴욕 코스모스팀에 당시로선 상상도 할수 없는 거액인 700만달러의 이적료를 받고 이적했다. 이때의 이적을 성사시키기 위해 미국은 당시 국무장관인 키신저가 "브라질과 미국의 우호관계를 위해" 펠레의 이적을 허락해 달라고 호소했을 정도였다. 그는 이후 은퇴하여 브라질 체육부 장관을 역임 했으나 지금은 축구 해설자 및 마스터카드의 전속 모델로 활약하고 있다. 2002년 월드컵 유치를 놓고 일본의 손을 들어주기도 하여 한국 축구팬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1958년 월드컵에서 13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중 최고자'로 기록된 쥐스트 퐁텐이 있지만 "쥐스트 퐁텐은 레이몽 코파가 없었으면 그렇게 많은 골을 기록하지 못했다"라고 할 정도로 당시 프랑스 대표팀에서 레이몽 코파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코파는 원래 폴란드 태생으로 1949년에 프랑스로 이주하여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였다. Stade Reims팀에서 뛰며 1953, 1955년 프랑스 리그 우승을 시킨 뒤 1956년 레알 마드리드와의 유럽 컵 결승에서 활약한 뒤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그는 이후 레알 마드리드에서 활약하며 레알 마드리드의 유럽 컵 우승에 기여한 뒤 1960년에 다시 Reims팀으로 돌아와서 활약했다. 이후 '유럽 최우수 선수'에게 수여하는 '골든 볼'도 1962년에 수상했다.
'세계 최고의 골키퍼가 누구냐?'는 질문에 전문가들의 대답 1순위가 바로 야신이다. 월드컵의 정식 수상종목 중 유일하게 사람 이름이 들어가는 것은 최우수 골키퍼에게 주어지는 '야신 상'뿐이다.소련이 1956년 올림픽 우승, 1960년 유럽 선수권대회 우승 등의 화려한 성적을 거둘때의 소련 대표팀의 핵은 야신이었다. 곡예사 같은 묘기, 위기에서도 당황하지 않는 침착한 플레이로 소련의 최 후방을 지키며 '흑거미', '신의 손', '철의 수문장' 등의 별명을 얻으면서 소비에트 축구를 단숨에 세계 정상급으로 끌어올리고 각종 대회에서 우승 1순위를 벗어나지 않게 한 위대한 선수다. 월드컵에서는 잇달은 불운으로 1966년 월드컵 4위가 최고 성적이었지만, 소련의 국민적인 영웅으로 그가 사망했을 때 소련의 이타르 타스 통신은 주저없이 "소련의 가장 유명하고 위대한 스포츠 맨 사망"이라는 기사제목을 뽑았고, FIFA는 그를 기념하기 위해 월드컵 대회의 최고 골키퍼에게 주어지는 상 이름을 그의 이름을 기념하여 '야신 상'으로 이름지었다. 지금도 FIFA에서 개인상에 이름을 붙인 것은 오직 야신 뿐이다. 지금도 소련에서 갈려진 공화국들에서 구 소련시대까지 포함한 축구선수의 인기투표를 할 때에는 아예 야신을 제외시켜놓고 인기 투표를 할 정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