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보기

두 가지 경구

Redwall 2008. 11. 5. 06:43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면 얼마나 행복해지겠는가'


- <중독의 심리학>,인도 불교학자 나가르주나



르누아르는 인생은 '끊임없는 유희'라고 했다.
낙천적인 르누아르는 늘 즐거운 장면만을 그렸다.
그는 불쾌한 것이 많은 세상에
또 불쾌한 것을 창조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화가였다.


- <미술관에 간 화학자>, 전창림



 어제오늘 읽고 있는 책들 중에서 머리를 때리는 구절들이다. 

 <중독의 심리학>은 이제 겨우 세 장만을 넘겼을 뿐이다. 저 구절은 서문 앞에 나와 있는 짧은 경구이다. (이런 걸 공식용어로 뭐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 짧은 문장에서도 평소에 생각해오던 것과 공명하는 바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가슴 속에 욕망을 품고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 다른 말로는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여러가지로 애쓴다. 이는 노력이라는 건전한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중독이라는 남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양쪽 모두 그 과정이 되었든 결과가 되었든 힘들기는 마찬가지이다. 최후의 결과론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는 전자와 같이 노력하는 결과 얻게 될 열매의 달콤함에서 느끼는 행복감이 최고의 극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거기에 다다르기 위하여 요구되는 많은 희생과 아픔, 그리고 무엇보다 이루지 못함에서부터 오는 좌절(왜냐하면 높은 목표일수록 다다르기는 더욱 힘들고 쟁취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밖에 없는 것이기에)은 감당하기가 만만치않다. 어쩌면 여기서부터 우리를 괴롭히는 중독의 시발점이 마련되는 건지도 모른다. 만약 욕망을 조절함으로써 그로부터 자유로워질수 있다면 인생의 모든 순간이 행복일 것이다. 물론 인간인 이상, 아니 생물인 이상 욕망이라는 것이 없을 수는 없고 또 목표의식없는 안일한 삶을 살자는 뜻은 아니다. 욕망과 목표는 분명 구분되어야 하며, 각각에 대한 내면적인 면밀한 이해와 인정이 바탕이 되어야 행복으로 가는 끈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속박시키는 것은 외적 요인 뿐 아니라 내부에도,그것도 만만치않은 정도로, 존재한다. 스스로를 다스리는 법은 참으로 어렵다. 사람의 내면과 행태를 중독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접근해가고 있지만, 결국은 마음을 다루는 방법을 얘기할 것 같은 예상이 들어서 흥미를 가지고 읽어보고자 한다.

 '시니컬'은 이 시대를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 중 하나이다. 즉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시니컬하다라고 끊임없이 되뇌인다. 이는 자신이 남들, 그러니까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로 뭉뚱그려진 일반 대중들,과는 다르다고 주창하기 위해 스스로를 유리시키는 효과적인 수단으로서의 용어이다.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주로 세상의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경우가 많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생각은 예술과 같은 창조행위에도 반영되어 괴벽과 기괴함의 미학으로 이야기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세상이 부조리로 가득차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창조의 행위를 설명하는 르누아르의 관점은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르누아르의 말에 의해 그가 세상이 가진 부정적인 측면을 통찰하고 있고 그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그의 따뜻하고 쾌활한 그림이 실은 세상에 대한 환멸으로부터 나온 반증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은 놀랍다. 따지고보면 불쾌한 것이 가득한 세상이라고 해서 또다른 불쾌함을 추가하는 것은 그 세상에 속하여 있는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세상의 부조리를 제대로 간파하는 순간 유쾌함을 추구하기 시작하게 된다는 르누아르의 생각.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다. 그는 본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