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보기

동생 이야기

Redwall 2009. 2. 17. 02:04

동생 이야기를 해보자면 사실 하룻밤을 다 지새워도 모자랄 것이다. 아니 하룻밤이 뭐야. 한달 내내 떠들어대도 동생에 대한 얘기는 끊임없이 할 수 있을 듯 하다. 여동생이라는 존재가 내 옆에서 기어다니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순간부터 한 집에서 동거하고 있는 현재까지, 내 삶에 있어서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려운 존재로 자리매김하게 된 나의 하나뿐인 동생. 어찌 몇마디 말만으로 그에 대한 얘기를 마무리지을 수 있으랴.
수없이 많은 얘깃거리가 존재하지만 지금부터 할 얘기는 특히 동생이 가진 문화적인 측면에 관련된 얘기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형제애일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내 동생은 나와 세 살 터울이 진다. 세 살 차이라는 건 한국에서의 성장과정을 놓고 볼 때 조금 미묘하다. 초등학교를 제외하고는 같이 학창생활을 경험하지 못하였고 심지어 캠퍼스라이프마저 서로 다른 지역에서 하게 되면서, 2차집단에서 공유할만한 시간을 가지기가 상당히 어려웠던 나이차이이다. 그렇지만 또한 둘 모두 같은 년도에 각각 중학교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또 각각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진학하고, 군대를 가고 학위를 받는 등등 어떤 변화의 시기가 일치해왔다는 점에서, 동생이라는 존재가 내가 밟아간 전철을 차근차근 밟아오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통해 어떤 일체감이 더욱 강하게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79년과 82년에 태어난 사람들이 자라는 과정에서는 그 3년이라는 시간이 주는 별다른 괴리가 없었고 동생의 기억 역시 나의 기억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점은(동생은 특히 예전의 어떤 사건들을 기억해내는 데 있어서 비상한 재주가 있다.), 나이차이에도 불구하고 일체감을 강화시키는데 한몫해 왔었다.
어린 시절에 같은 집 안에서 부대끼며 살면서 같이 놀게 되는 시간이 가장 많은 사람은 아무래도 동생이다. 세월의 더께는 무시할 수 없어서, 이는 서로의 취미생활과 문화적 기호에 서로서로 영향을 미쳐왔던 것 같다. 하지만 아무래도 집안에서의 권력구조에 따라 동생이 나에게서 영향받은 바가 더 컸겠지.

사실 내가 이 얘기를 쓰려는 데에는 다음의 글이 큰 역할을 했다.

http://djuna.cine21.com/bbs/view.php?id=main&page=1&sn1=&divpage=16&sn=on&ss=on&sc=on&keyword=세간티니&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88409

과연 남자와 여자의 취미생활과 문화는 그렇게 구분되는 걸까. 아마 나의 생각의 흐름은 남자보다는 여자 쪽에 더 초점이 맞춰져있었을 것이다. 된장녀로 대표되는 여성들의 문화코드에 대해서 비판적인 잣대를 들이대고파 하는 나의 본능 아닌 본능이 작용했을 테니 말이다. 문화적인 측면에서 볼 때 대한민국의 20~30대 여성의 전형은 무엇일까. 뭐 일단 한두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나이와 성별이 같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는 엄청난 범위의 스펙트럼이 존재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집단 내부를 결집하여 정의하는 것 말고, 남자와 여자라는 상대적인 개념에서 바라보는 경우에 정말 상대적으로 남자는 술이 떡이 되는 일에나 몰두하고 또 여자는 브런치를 먹으며 와인라벨을 읽는 일에 집중하는 것인가. 이러한 남자와 여자는 과연 '있는가'에 대한 생각은 적어도 우리 남매에 있어서는 통용되지 않는 것 같다.

동생의 취미활동을 가만히 살펴보면 웹서핑을 바탕으로 한 쇼핑, 드라마 다운받아보기, 독서, 술마시기(;;), 영화보기, 요리, 차(tea)나 잡다구리한 미니어쳐 모으기 등등 정말 평범하기 그지없다. 각 분야에 대해 해박하거나 정돈된 지식을 가지고 있지는 못한 것 같지만, 그래도 나름 체계적인 인식들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치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다. 문화적인 측면에서 볼 때 동생의 인지는 보통의 여자들에 비하여 훨씬 넓은 범위를 커버한다. 예를 들어 동생은 적벽대전에서 왜 조조가 패배했는지를 적벽대전 영화를 보기 전부터 알고 있다 - 삼국지는 위 기사에서 대한민국 남성들의 애독서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어떤 시즌에는 이윤열의 경기기록과 스타리그 팀들의 순위변동상황을 외우고 있었으며, 마재윤이 그 수많은 리플레이에도 불구하고 이기는 경기를 자기에게 한번도 보여주지 못했다고 열을 내곤 한다. 램파드와 제라드의 플레이스타일을 구분하고, 호날두와 나니 그리고 안데르송이 나오면 지성박이 뛰고 있는 동안에도 채널을 돌리며, 트레제게의 닌자모드와 델피에로의 프리킥 그리고 네드베드의 폭풍돌파에 대해 토론하기도 한다. (나와 함께 새벽에 유로2008 경기들을 관람하기도 했다. 심지어 내가 경기를 보다 졸고 있을때조차도..) 또한 어젯밤 우리는 기어스 오브 워2에서 호드를 결성해 레벨 20을 넘지못하는 한계를 느끼고 함께 분통을 터뜨렸던 전우이기도 했다. ㅋㅋㅋ 슬램덩크 전권을 박스째로 모으고, 함께 우리 개 이야기를 보며 눈물짓기도 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어느 해에 피판과 지프를 함께했던 기억은 고맙고도 또 소중한 기억이다.

동생은 지난 시간동안 나를 오빠로써 많이 따르고 또 좋아해줬다. 하지만 위에 잔뜩 늘어놓은 그런 문화적 코드들을 지니게 되기까지 얼마나 나를 많이 참아야 했었으며, 또 얼마나 나를 좋아해 주었던건지를 헤아려보면 눈물만 나올 뿐이다. 나이가 들수록 동생이 자기 세계의 지평을 넓혀나가고 새로운 분야로 도전해가고 있지만  그렇게 넓어져가는 세계를 이해해주지 못하고,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던 날들을 떠올려보면 그저 미안하기만 할 따름이다. 동생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레서피들 중 나는 단 하나도 습득하지 못했다. 먹기는 많이 먹었지만 말이지. 동생이 면허를 땄음에도 나에게 운전연수를 받지 않으려는 것은, 그녀가 말한대로 운전에 대한 거부감도 있을지 모르지만, 더이상 나와 함께 무언가를 하려는 데에서 수십년만에 슬슬 피곤을 느끼게 되어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점점 좋은 오빠와는 거리가 멀어져가고 있다. 다른 남매와 달리 벽이 없다고 느꼈었지만, 막상 벽이 쌓이기 시작하니 그 속도가 걷잡을 수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내가 슬퍼진다.

그래서 나는 이번 주에 우선 동생에게 크게 한 턱 내고 싶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우울. 하지만 그 안에 자리잡은 따스한 편안함. 한 끼 식사로 이를 회복시키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생각해보면 동생과 밖에서 술을 한잔 해본 것도 언제인지 모르겠다. 술한잔을 나누며 요즘 무엇을 생각하는지, 또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해 얘기해보고 싶다. 언제든 부르면 다가와서 웃어주는, 태어나서 가장 먼저 만든 소울메이트에게 더이상은 소홀할 수가 없다.